
지인의 추천으로 소개 받아 읽게 된 김훈 작가의 "공터에서".
부끄럽지만 책 읽는 습관 들인 역사가 길지 않은 저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어서 찾아 보니 "칼의 노래" 작가이시더라고요.
"칼의 노래"만 많이 들어 봐서 언젠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만 있었는데, 결국에는 "공터에서"로 김훈 작가 작품에 입문하게 되네요.
-줄거리-
본 작은 일제시대부터 군부독재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다난했던 근대사를 살아 간 마동수와, 그의 두 아들, 마장세와 마차세의 삶을 조명합니다.
동부전선 최전방에서 복무하는 상병 마차세는 오랜만에 휴가를 써서 서울에 있는 집을 방문합니다. 마차세가 대학가 주점에서 여자친구인 박상희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말기암에 걸린 마동수가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마차세. 오히려 마동수의 영혼이 아직도 이 세상을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마동수는 가족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 무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동수는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어떠한 기별도 없이 보름이 넘는 기간을 밖에서 보내고 예고도 없이 불쑥 집에 찾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버지는 왜 집에 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아버지는 왜 집에 오는 것일까? 그 두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마차세는 그 어느 쪽도 알 수 없었는데, 그 두 개의 의문은 한 개의 의문인 듯싶었다. 마차세는 아버지가 헤집고 다니는 세상의 가장자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 저쪽으로 아주 건너갈 것인지를 망설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마차세는 짐작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숨이 가르릉거렸다. 뒤로 젖혀진 아버지의 머리 너머로, 빈 운동장에 어둠이 내렸고 저무는 마을에 불이 켜졌다. 마차세는 아버지가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릴 것 같은 조바심을 느꼈다. 그 조바심에는 사슬을 끊으려는 충동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그때 마차세는 알지 못했다.
아들들의 눈에 마동수는 불가해한 존재이자,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마동수가 임종의 찰나에 돌이켜 본 지난 날에는 남산 경찰서에서의 일화가 등장합니다.
마동수의 형, 마남수는 한국에 방문한 미 국회의원단의 행렬을 구경하러 갔다가 불순분자로 의심되어 남산 경찰서에 연행됩니다. 밤새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형을 마중 나온 어린 마동수는 형과 함께 경찰서 뒷골목 해장국집에서 국밥을 먹었습니다.
59년 전 그날 새벽, 남산경찰서 뒷골목 해장국집의 누린내 나는 김 속에서 국밥을 먹던 피투성이 사내들의 허기와 괜찮다, 너 돈 가졌냐, 밥 먹자, 배고프다던 형의 목소리가 자리에 누워서 마지막 며칠을 견디는 마동수의 뿌연 의식 속에 떠올랐다. 그때,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기억은 바래어져서 아무런 현실감이 없었지만, 임박한 죽음보다 더 절박하게 마동수를 옥죄었다. 비닐 장판에 누워서 마동수는 그날의 새벽을 응시했다. 세상은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어린 마동수는 세상은 결코 달아날 수 없는 무서운 곳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해장국 사건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마남수의 편지를 계기로 마동수는 중국으로 떠납니다. 그는 그곳에서 갑판 청소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중국으로 건너 온 동포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일제의 야욕은 중국까지 뻗었고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마동수는 길림, 만주 등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보냅니다. 그 와중에 아편에 손을 댔다는 묘사가 있으니 그 생활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는 쉽게 상상이 되겠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돌아 온 한국에선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피난길 끝에 도착한 부산에서 마동수는 부상당한 미군의 군복을 세탁하는 일을 하며 일당을 버는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마동수는 바로 그곳에서 아내가 될 사람, 이도순을 만나 두 아들인 마장세와 마차세를 갖게 됩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마장세와 마차세의 유년 시절은 궁핍함과 세상을 떠도는 아버지로 인해 불우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형 마장세는 군복무 도중 차출되어 베트남으로 파병을 갑니다. 그는 어느 헬기 공수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전은 강하 순간을 노리고 매복해 있던 베트콩들에 의해 아군 대부분이 사살되며, 시작부터 끝나 버렸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마장세는 생존한 전우 둘과 함께 정글 속을 며칠 밤낮을 걸어, 대대본부에 생환하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국군의 사기를 진작하고 새로운 도보 작전로를 개척한 공로로 마장세는 무공훈장을 수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살아남은 전우는 둘이 아닌 셋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정팔이었죠. 김정팔은 어깨 관통상을 당해 좋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마장세는 처음에는 그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만, 앞으로의 생존 문제가 걸린 상황에서 김정팔의 존재는 그 확률을 낮추는 방해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쓰러져 있는 김정팔의 머리에 총을 격발하여 사살합니다. 이런 진상은 철저히 묻힌 채, 김정팔은 베트콩과 열심히 항전하다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었죠. 마장세는 가족 그 누구에게도 무공훈장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습니다.
마장세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파병 종료 후에 그는 한국행이 아닌 괌으로 가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가 한국행을 택하지 않은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한국은 아버지가 정처없이 떠도는 곳이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한국은 자신이 죽인 김정팔이 묻혀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장세는 아버지의 부음에도,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몸져 누워있다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습니다. 설사 사업차로 한국에 오게 되는 일이 있어도 집에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마장세에게 한국의 가족들은 아버지의 누추한 삶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존재이자,그 흔적의 무게에 짓눌려 그저 살아갈 뿐인 허망함과 무력함을 전염시키는 존재였습니다. 마장세의 괌 행은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려는, 더이상 공터에서 방황하지 않으려는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마장세의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는 미크로네시아의 고철을 처리하는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고 그 고철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한국에서 고철 사업을 하고 있는 사업가, 오장춘을 만납니다. 마장세는 미크로네시아 지역 정부와 고철 처리 계약을, 오장춘과 고철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돈이 되지 않을 고철들은 몰래 바닷속에 수장하고 허위로 작성한 보고서를 올려 돈을 받아내었고, 돈이 될 고철들은 한국의 오장춘에게 보내 돈을 벌었습니다.
마차세는 형과 다르게 사랑하는 여자친구 박상희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립니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아버지와의 끊을 수 없는 사슬을 실감하면서 말이죠. 마차세는 대학 중퇴자이자 실직자였고, 박상희는 공모전에 거푸 낙방하는 미대 졸업생이었습니다. 둘은 마장세로부터 가끔씩 날아오는 생활비에 근근히 의지하며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공교롭게도 오장춘은 마차세의 군대 동기였습니다. 실직 생활을 이어오던 마차세는 형 마장세의 도움으로 오장춘의 회사 직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장세는 마음 속 일말의 꺼림찍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이런 데서 마차세가 튀어나오는 것인가. 마장세는 오장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작고 쏘는 듯한 눈이 분주히 깜박거리면서 무언가를 헤아리고 있었다. 무슨 일에나 손해 볼 사람은 아니지 싶었다. 이자와 나와 마차세 사이에 올가미를 놓아서, 내가 버린 끈의 저쪽을 끌어당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마장세는 덫 줄이 점점 더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마장세의 간계가 들통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어선들이 자꾸 해저의 무언가와 부딪혀 사고가 나자, 조사에 나선 당국이 수장된 고철더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장세는 지역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사랑하고 있다는 처, 린다가 그의 수행비서인 쉬누크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장세의 사업 파트너, 오장춘의 회사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장세와 오장춘이 국내 마약 유입에 연루되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오장춘은 수배 중에 전국을 떠돌다가 어느 여관에서 자살을 선택했고, 그의 회사는 말 그대로 공중분해 되었습니다. 마장세는 추가조사를 위해 그토록 떠나고자 했던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고 마차세는 그런 마장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됩니다.
마장세는 감방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다가왔다. 수염이 자랐고 몸이 말라서 옷이 헐렁했다. 걸음걸이가 끌리는 듯했고 나이보다 한참 늙어 보였다. 마차세는 멀리서 아버지가 다가오는 듯한 환영을 느꼈다. 어느 변방을 겉돌고 헤매는지, 두어 달 만에 한 번씩, 겨울이면 새벽에 기침을 쿨럭이며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마장세의 걸음에 옮겨 와 있었다.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다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인가.
-느낀 점-
매번 책을 읽고 읽어도 저번에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나 감상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증발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나머지 독후감을 책을 완독할 때마다 적으리라는 굳은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을 세우고 난 뒤 처음으로 읽은 책이 "공터에서"였습니다.
"공터에서"를 읽는 틈틈히 책 내용을 잊지 않겠다고 줄거리나 인상 깊은 문장을 하나하나 메모하고, 작중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자문자답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덕에 같은 페이지 수를 읽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책을 곱씹으면서 읽는다는 느낌이 제대로 드는 것이, 진정한 독서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책의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압축하자면, "거처 없이 떠돌아 다닌 남루하고 미련한 아버지의 삶이 남긴 굴레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무력한 아들들"로 줄이고 싶습니다. 두 형제 모두 아버지의 굴레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둘의 반응은 천지 차이였습니다. 온갖 노력에도 모든 것을 잃은 마장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하는 점, 가정을 꾸려 아버지가 남겨 놓은 흔적이 잔재하는 앞날을 살아 가려는 마차세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에도 있는 공터의 의미가 무엇인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목의 공터는 분명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이 공터라는 단어에 함축된 추상적인 의미를 더 파헤쳐 보기 위해 비어 있다는 공터의 특징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공터는 작중의 마씨 삼부자가 느꼈던 비참한 삶과 그 삶과 관계하고 있는 것들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터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던 마동수의 삶은 공터와 같이 비어 있던 것입니다. 그런 마동수가 떠돌아 다니는 한국은, 마동수의 아들들에게 있어 마동수의 헤매이던 삶을 더없이 들이미는 공터와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요?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려 두 딸을 가진 또 다른 아버지, 마차세는 유치장에서 형과의 면담 후에, 직장에 취직하기 전까지 생활비 충당을 위해 임시로 오토바이 배달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런 그가 아버지가 남긴 공터를 채워나갈 수 있을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마차세를 지켜 봐 온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습니다.